
마감 1분 전의 미학,
그리고 9440억 원의 산수
재산분할 파기환송심 판결에 불복해 재상고를 택한 어느 재벌가의 이야기 — 숫자로 읽는 이 시대의 협상술.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마감'이 있다.
과제 제출 마감, 세금 신고 마감, 그리고 9440억 원짜리 재상고 마감.
최태원 SK그룹 회장 측은 이 중 마지막 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소화해냈다.
기한 만료 1분 전, 그러니까 밤 11시 59분에 상고장을 제출했다는 소식에
전국의 마감 노동자들이 일제히 동질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역시 압박이 있어야 완성되는 법."
다만 보통 사람의 마감이 밀린 이유는 게으름이고,
이쪽의 마감이 밀린 이유는 9440억 원을 3주 안에 현금으로 구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점이 스케일의 차이를 보여준다.
애초에 대주주가 보유 주식을 팔아서 현금을 마련하는 방법도 검토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마치 집주인이 월세 낼 돈이 없어서 집을 통째로 파는 것과 비슷한 그림이다.
다만 그 집이 시가총액 수십조 원짜리 그룹 지배구조라는 게 함정.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현금 반, 주식 반"이었다.
여기에 붙은 조건이 압권이다.
"주가가 떨어지면 제가 차액을 메꿔드리겠습니다.
대신 주가가 오르면 그 이익은 제가 갖겠습니다."
언뜻 신사적으로 들리지만,
냉정히 뜯어보면 손실은 함께 지고 이익은 혼자 챙기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금융상품 구조와 닮아 있다.
노소영 관장 측이 "현금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못 박은 건,
어쩌면 이 바닥에서 가장 합리적인 리스크 관리였을지도 모른다.
숫자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판결 확정 후 돈을 못 갚으면 연 5% 지연이자가 붙는데,
9440억 원 기준으로 하루에 약 1억 3000만 원, 연간으로 환산하면 472억 원이다.
웬만한 중견기업 한 해 영업이익과 맞먹는 돈이 그냥 '이자'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 쌓인다.
보통 사람들은 카드값 며칠 밀렸다고 문자 폭탄을 받는데,
이쪽은 하루 지각비가 아파트 한 채 값이다.
돈이 많아도 걱정이 많다는 옛말이 이렇게 스케일 크게 실현될 줄은 몰랐다.
법리 다툼의 핵심도 나름 흥미롭다.
재판부는 주식 가치를 2024년 4월 16일 기준으로 매기면서도,
그 이후 주가가 5배 넘게 뛴 걸 분할 비율에 반영했다.
기준일은 과거인데 상승분은 인정하는,
시험에서 "이 문제는 안 나온다고 했잖아요"와
"그래도 배운 범위는 맞잖아요"가 동시에 성립하는 듯한 논리 구조다.
결과적으로 노 관장 몫은 33.3%로, 항소심이 인정했던 35%에서 살짝 깎였다.
1.7% 포인트 차이가 몇백억 원 단위로 환산된다는 걸 생각하면,
소수점 하나가 이렇게 무거운 분야도 드물다.
그럼에도 이 모든 소동의 결론은 의외로 심심할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 재상고심은 사실관계를 다시 따지는 게 아니라 법리적 오류만 살피는 절차라,
결론이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9년을 끌어온 소송이 결국 시간만 조금 더 벌고 원점 근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마감 1분 전의 드라마는 화려했지만,
다음 화 예고편은 의외로 잔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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